한국교과과정에서 일본에 대한 이야기는 '왜구' 밖에 없는 관계로 일본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알 기회가 없는데, 일단 좀 그걸 바꿔야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중국역사가 한반도의 역사에 끼친 영향이 크지만, 세계사 시간이 중국사 시간은 아니지 않은가?
여튼, 위키피디아에서 개략적인 일본사를 읽어보니, 궁금한 것이 하나 생겼다. 17세기 경에 일본은 쇄국정책을 실시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이미 17세기경에 일본에는 서양세력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것 아닌가..어떻게 해서 일본엔 그렇게 빨리 서양세력이 들어왔고, 조선엔 그렇지 못하게 된 것일까..왜 서양세력이 일본엔 관심을 갖고, 조선엔 관심을 갖지 않았을까? 어쩌면 이미 그때부터 생산능력및 잉여자원이 이미 일본이 월등했기 때문에 상인들이 일본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닐까? 17세기경의 조선과 일본의 국가 총생산에 대해서 알 수 있으면 재미있을 것 같다..
결국 조선은 그때부터 상공업에서 일본에 밀리기 시작해서 결국 20세기 초에는 일본에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지 않았을까.
------------------
17세기경에 대한 정보는 웹검색에서 쉽게 나오지 않았으나, 위의 19세기말~20세기 초 일본과 합병당시의 조선과 일본의 국력에 대한 개략적인 논평글을 찾았다. 원문은 (여기 from 신동아 by 이영훈) 물론 이 이영훈이란 분이 좀 논란의 여지가 있으신 분이지만, fact를 조작하지 않았다는 가정을 하면, 이미 조선은 19세기보다 훨씬 전에 일본에 뒤처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이 구조적인 문제였건, 18세기이후 조선왕조의 경제가 무너지게 되어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반면에 세차게 중국에 도전하고 있던 일본의 국력을 너무 과소평가했다. 당시 재정규모나 통화량 등의 경제지표에서 일본은 조선보다 무려
20배 규모의 대국이었다. 그렇지만 조선의 위정자나 일반 지식인들은 일본을 바다 가운데 있는 조그마한 야만국으로 간주했다.
---------------------
혹시나 해서 임진왜란을 찾아봤더니 1592-1598 에 있었다. 즉 16세기 말에 조선은 경작가능한 토지와 경제활동인구의 대규모 감소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곳이 상인들이 관심을 받을리가 없어 보인다. 게다가, 그걸 회복하기도 전에 병자호란으로 당시 떠오르던 대국 청나라와의 한판을 벌였으니 조선은 17세기 전반동안 계속 휘청거리고 있었을 것 같다. 에도 막부는 임란동안 조선으로 부터 데려온 도공과 대장장이들 덕에 17세기 부터 도자기와 제철능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으니, 상인들의 관심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
“이 가난한 나라는 교역할 상품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지만, 단 인삼(‘ginseng’으로 표기되어 있다)이라는 대단히 중요한 아이템이
있다”는 것이다.
from 여기 : 1692년 네덜란드인의 저서에서..
교역할 상품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지만.. 이란 표현에서 조금 기분이 상하기는 하지만, 당시 전세계를 상대로 교역하던 네덜란드 인이 보기에 조선은 그다지 매력이 없는 국가였음에 틀림없다.
----------------------
조선의 주요 아이템이 인삼이라는 위의 글에 착안 조선이 주로 인삼을 가공한 방법이었던 홍삼을 조선왕조 실록에서 검색해보았더니 영조 47년 (1771년) 에 이런 기록이 있다.
(이 홍삼은 정말 조선의 필수 아이템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고종 36년 (1899년) 청나라와의 통상조약을 맺을 당시에도 홍삼은 민간 수출을 금한다는 항목이 있을 정도이었다. )
영조의 상업에 대한 인식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는 하교이기도 하지만, 일단 세수는 대략 은화로 수천냥이었으나, 실제 조선의 교역규모는 사신이 한번 오갈 때에 수백~수천만냥은 족히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관료와 상인을 포함해 사절 규모가 1회에 80~100명정도 되었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런 사절단이 년간 수차례 다녀왔으니 영조시대에 조선의 청나라와의 교역규모는 대략 수천만냥 ~ 수억만냥 정도가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렇다면 조선내에 유통되는 은의 양은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라 짐작이 된다. 생각보다는 18세기 말 조선의 사회가 경제적으로 활력이 있었던 것 같다.임금이 자정전(資政殿) 에 나아가 상참(常參)과 조강(朝講)을 행하고 하교하기를,
“아! 탁지(度支) : 호조 에다 1년에 세(貰)로 바치는 은(銀)은 수천 냥(數千兩)에 불과한데 한 사람의 사행(使行)이 가지고 가는 것은 거의 10만 냥에 가까우니, 옛날에도 이런 일은 결단코 없었다. 더구나 팔포(八包)(의주 상인으로 하여금 사신을 수행할때 지니고 가게 하는 물건) 는 〈대상(對象) 물건이〉 본래 인삼(人蔘)이었는데, 그 인삼을 지탱할 수가 없어 남쪽과 북쪽에서 백사(百絲)와 정은(丁銀)으로 유천(流泉)을 만들게 되었으니, 아! 나라 가운데 몇 십만의 광은(礦銀)을 요수(遼水)로 흘려 보내게 하고 쓸데없는 당화(唐貨)17840) 를 짐바리에 가득 싣고 돌아오니, 이것이 어찌 나라를 위하는 원대한 도리이겠는가? 내가 바로 사치를 금지하는 장본인으로 내가 일찍이 비단옷을 입지 않았는데도 몇 년 동안 내려오면서 그 값이 높게 뛰어올라 전인(廛人)이 폐해를 입고 있는데, 그 폐단을 제거하려고 하면 그 근본을 바르게 하는 것이 마땅하니, 하나는 근년(近年)에 가정(加定)한 역원(譯員)을 줄이는 것이며 하나는 저들이 만약 값을 높게 정하면 포장한 것을 풀지 말고 본래 포장한 대로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역원을 줄이게 되면 팔포 대상(大商)은 저절로 따라서 줄일 수 있으며, 교역(交易)을 하지 아니하고 온다면 피인(彼人)의 조종(操縱)은 저절로 그치게 할 수 있으니, 이는 한 번 호령(號令)하는 일에 불과한데 어찌 번거롭게 순문(詢問)하겠는가? 금년의 절사(節使) 및 재자관(䝴咨官)17841) 부터 시작하도록 하라. 그리고 지난날에 없었던 명색(名色)은 한결같이 모두 조사하여 줄이게 하라
그렇다면 일본은 이보다 더 활력이 있었단 것일까? 아니면 일본에 은광이 많아서 일본에 물건을 팔고 얻은 은이 청나라로 흘러들어간 것일까? 아니면 19세기 조선이 뭔가 사회가 붕괴되면서 합병즈음에 문제가 생긴 것일까? 갑자기 더 많은 궁금증이 생긴다. 아..이런 정신을 research할 때 써야할 것 같은데..
-------------------------------
퍼즐이 하나둘씩 맞춰져 가는 느낌이랄까.
17세기에 일본의 은생산량은 어마어마해서 당시 전세계 총 은생산량의 1/3을 차지하는 이와미 은광이 있었다 한다..(http://en.wikipedia.org/wiki/Iwami_Ginzan_Silver_Mine)
댓글 없음:
댓글 쓰기